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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는 헛간의 벽에서 걸망을 끄집어냈다. 걸망 안에는 스승 만화 덧글 0 | 조회 72 | 2019-09-23 08:33:51
서동연  
경허는 헛간의 벽에서 걸망을 끄집어냈다. 걸망 안에는 스승 만화로부터 받은 웅담 한 조각과 병중의 옛 은사스님 계허에게 줄 녹차가 한 통 들어 있었다. 다통 한가득 들어 있는 녹차는 매우 진귀한 물건으로 행자생활을 할 때부터 유난히 녹차를 좋아하던 옛 은사스님을 익히 봐왔었으므로 특별히 따로 준비한 진품이었다.간밤과는 다르시네. 간밤에는 나를 못 가게 옷이 찢어지도록 붙들고 나서는.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손때를 묻힌 것은 바로 만공 스님의 손이었을 것이다.죽음이란 타고르의 시처럼 여행의 준비 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살아 있는 동안 간직하였던 문의 열쇠를 돌려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을 때 내 이웃이었던 어머니는 부르심을 받아 이 지상의 상식으로는 알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났는지도 모른다.나는 수덕사가 어디에 있는 절인지 알지 못하였다. 무슨 풍문에서 전해들은 대로 한때 춘원 이광수와 연애하던 어떤 여류 문인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평생을 살다 죽은 유명한 여승들의 절이 있는 곳이라는 애매한 소문만 알고 있을 뿐 전혀 감감하였다.어느 집에 또 사람이 죽어 넘어가 염불이라도 해주러 나온 겨, 아니면 두 눈이 멀어 저 대문 앞에 내 걸린 금줄도 못 보는 앞못보는 봉사 스님이라도 되는 겨. 그 선비와의 공부는 한여름 동안 내내 계속되었는데 선비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여름 청계사에서 보낼 요량으로 갖고 들어온 한서 열 권 정도를 모두 끝냈고 더 이상 배울 책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여름 동안에 벌써 문자는 모두 익혀 웬만한 문장은 읽고 그 뜻을 헤아리는 데 전혀 거침이 없을 정도였다.어머니.아내는 잠시 슬픔도 잊어버린 듯 노랑나비를 누구보다 맨 먼저 보았다는 사소한 즐거움으로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때였다. 뭔가 희끗희끗한 먼지 같은 것이 허공에서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실낱 같은 눈발이었다. 아직 체중이 실릴 만큼의 많은 눈발들이 못 되어서 키질하여 까불러 오르는 낟알에서 털려져 나아가는 티끌처럼 푸득푸득 내릴 뿐
문안에서부터 빗장을 여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문이 열리고 젊은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펄럭펄럭. 꽃을 시샘하는 짓궂은 봄바람에 꽃잎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흰 치마도 함께 나부끼고 있었다.스승 계허는 다만 그렇게만 말하였을 뿐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는 아니하였다. 스승의 말을 듣자 경허는 할 수 있는 일은 걸망에 자신의 짐을 싸는 일이었다. 걸망에 짐을 넣는다고 하여도 서생 박 처사가 물려주고 간 서책들과 간단한 문구들을 빼면 텅 빈 바랑일 뿐이었다. 길가는 도중에 먹을 수 있도록 소금 뿌린 주먹밥 몇 개를 만들어 넣고서 경허는 짚신 서너 켤레를 삼기 시작하였다.홀로 앉아 벗긴 감의 속살을 먹으면서 나는 중얼거렸다..제가 방에 들어가보았어요. 이상하다 싶었거든요. 새벽마다 할머니가 닭장에 나와 닭들에게 모이를 주시곤 하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어디 몸이 편찮으셔서 그러셨나 부다 생각하고 방으로 들어갔지요. 문 앞에서 아무리 할머니, 할머니 하고 불러대도 대답이 있으셔야지요. 그래서 제가 방으로 들어갔더니, 글세 할머니가 순벼 계셨어요. 전혀 아프신 데도 없으셨구 어젯밤에도 맛있게 밤참까지 드셨는걸요. 제 말 듣고 계세요? 여보세요, 제 말 듣고 계세요?나는 기억한다.경허는 편지를 받자마자 즉시 만화 화상을 찾아 편지의 내용을 전하고 이십여 년 만에 옛 스승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남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계허는 만화의 옛 도반이기도 하였으므로 만화는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오늘은 또 어느 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것인가. 오늘은 또 어는 집에서 곡성이 터져 흐를 것이며, 어느 집 대문간에 금줄이 내걸릴 것인가. 오늘은 또 어느 집 대문에서 소의 멱을 따서 흐르는 붉은 생피를 처발라 액을 물리치려 할 것인가. 오늘은 또 어느 집의 노인이 산 채로 매장당하고, 또 어느 집에서 병에 걸린 환자들을 몰래 숨겨두었다 동리 사람들에게 발각당하여 온 집에 불을 지르는 끔찍한 화형을 당할 것인가. 그리하여 마을에서 쫓겨난 빈 집들이 얼마나 늘어